비잔틴 건축의 대표적 걸작 - 성 소피아 성당, 터키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의 의미
성소피아 성당이 건립되었을 당시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fia)였다. 터키 사람들은 아야 소피아(Aya Sofi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지혜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성소피아 성당이 있는 이스탄불
터키의 이스탄불(예전의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은 동방의 교역로로 엄청난 대도시입니다. 그 역사를 알려드리자면, 고대까지만 해도 트로이등 다른 도시가 더 큰도시였지만, 로마제국의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대신 비잔티움을 수도로 정한 뒤로(서방 로마는 행정에만 관련이있지만, 동방엔 문화, 문명등 중요한것이 밀집되어있다고생각)이스탄불은 최대의 도시가 됬습니다.
그리고 서로마, 동로마로 분열후에 비잔틴제국(동로마)로 되어 결국엔 성소피아 성당을 만든것입니다. 그리고 성소피아 성당주위에 보면 4개의탑이 있는데 그탑은 1493년 비잔틴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 투르크가 들어오면서 성 소피아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만든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데오도시우스황제 사후 동서로 분열됩니다.
서로마제국의 수도는 그대로 로마였고,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이었습니다. 비잔티움은 발칸반도 동쪽 끝에 붙어있는 대도시입니다.
이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에 성소피에 성당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세계사시간에 배웠겠지만 동로마제국은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은 콘스탄티노플의 위용에 감탄해 아예 제국의 수도로 정해버립니다. '이스탄불' 이라는 이름으로 바꾼채.........
술탄은 성소피아 성당의 위용에 감탄해 이후 이슬람사원은 성소피아성당와 같은 모양으로 짓도록 칙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이스탄불에 있는 이슬람사원은 하나같이 성소피아 성당을 닮았습니다.
훗날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 국가들은 독립했으나, 이스탄불은 여전히 터키 땅으로 남게되었습니다. 그리스가 힘을 키워 옛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되찾으려 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터키에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그리스의 침공을 막아내죠.
그리고 두 국가는 협상을 벌이게 되는데 터키반도 앞에 있는 섬 지역들은 그리스 영토로......... 이스탄불은 터키 영토로 남게되었습니다.
이스탄불은 유럽지역............. 터키는 어떻게든 아시아와 유럽, 두 지역을 걸친 국가로 남고 싶어서 터키반도 앞의 섬 지역들을 포기하고 이스탄불을 지켰다 합니다.
현재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탐블로 이름이 바뀌어져 잇습니다. 이스탐블은 터키의 영토로 유럽과 아시아를 있는 교량이 있는곳입니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었으며,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다. 보스포루스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걸쳐져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의 역사
이곳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호칭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고, 터키 지배 때에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첫 번째 세운 건물은 AD 390년에 지어졌다.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양식의 이 건물이었던 이 교회는 4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역시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유스티니안 황제 때, 532년에 히포드롬에서 마차 경기 도중 일어난 니카 반란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같은 해에 성 소피아의 재건축을 시작했다. 현재 건물은 세 번째 지은 건물이다. 이 건축에 동원된 기술자는 100여명, 노동자는 만 명이 넘는다. 이 교회는 5년 10개월 간의 공사 끝에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325) 대신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4세기의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후계자의 시대에 건조된 성당이 532년의 반란으로 파손된 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설계에 근거하여 재건을 시작하였다. 설계는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로스가 담당하고 100명의 감독 밑에서 1만 명의 공인이 작업을 하여 5년 10개월만에 완성하였다.
현존하는 성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 후계자 시대에 건조된 성당이 532년의 반란으로 파손된 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설계에 근거해 재건을 시작했다.
성소피아 성당은 아름다움만큼이나 고난이 많은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레오 3세 황제가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칙령을(성상금지령)을 발하면서 성소피아 성당의 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들이 손실됐다.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군들의 약탈 대상이 되고,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1453년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 500여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리스 정교회가 916년동안 사용했다. 회교사원으로 바꾸어진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회색 회칠이 더해졌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투루크 (터키 초대대통령)에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존 비쟌틴식으로 환원하기위하여 회치장을 벗기는도중에 중단되어서 비쟌틴과 이슬람양식을 다 볼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지만 현재 그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개관식때의 모습과 자재들
성 소피아 성당은 세계적인 수준의 최고급 대리석 유물 및 장식 모자이크가 채워졌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완공한 것이었으며, 537년 12월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건축 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왔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데미 선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앙 본관에 반암 기둥은 바알벡에서 가져왔다.
세계 4대 교회 건축물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성소피아 성당의 개장식은 대단히 대단히 화려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내부의 화려함을 보았을 때,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당시, 성 소피아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설계자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다. 성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건립한 건축가들은 트랄레(Tralles)의 안테미우스(Anthemius)와 밀레투스(Miletus)의 이시도루스(Isidorus)이다.
안테미우스는 기하학, 통계학, 그리고 동역학에 뛰어난 사람이었고, 이시도루스는 물리학을 가르쳤으며 아치형 천정 기술에 관해 저술을 남겼다.
이시도루스는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저술들을 편집했을 뿐만 아니라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헤론(Heron또는 Hero)의 천장에 관한 기술적 논문들에 주석을 달았다.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 모두 포물선과 만곡의 면에 관해 연구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구조
안 길이 81m, 너비 70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본당은 75m X 70m 로 거의 정사각형의 그리스 십자형 플랜에 가까우며 넓이는 7,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라고 안내를 하였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이렇게 장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기둥이 아닌 15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돔이라는 사실이다.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견본으로서 그 후 비잔틴 건축 양식의 모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회교 사원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회교 사원을 보면 가은데 거대한 돔과 보조돔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입구를 통해서 바깥복도를 지나 안복도에 들어서면 중앙에 황제의 문이라 불리는 커다란 문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의 문은 노아의 방주에서 가져온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성 소피아 교회 중앙 홀로 들어서게 되면, 왜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세계 4대 교회 건물에 들어가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말끔히 가시게 된다.
이 성당은 내부를 대단히 넓히고 외부의 빛을 가장 많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가장 오래된 대표적 건축물이다.
아치에 의해 정사각형 형태가 아치형 천정의 둥근 테두리가 되는 것은 펜덴티브(Pendentives)로 불리는 반원형의 삼각 면들에 의해서이다. 천정에는 금색 모자이크가 휘황한 빛을 발하면서 마치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정신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성당은 요소들이 독특하게 혼용되었는데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 성당처럼 세로로 기둥들이 늘어졌지만 본당 회중석은 정사각형에 그 위에는 대단히 큰 아치형 천정이 왕관처럼 올려 져 있다.
사방에 네 개의 뾰족한 첨탑들(minarets)은 1453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터키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첨탑들을 세우고 회교 사원으로 사용했다.
교회의 앞부분에 서서 천정을 쳐다보면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예수와 오른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보일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미랍을 보면 정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미랍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하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회교사원은 메카 방향을 향해서 지어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 정자 같은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왕이 예배를 보는 장소로 술탄 압둘 메지트가 지었다.
2층 갤러리에 도착하게 되면,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커다란 모자이크를 만날 수 있다. 중앙에 예수님, 왼쪽에 성모 마리아, 오른 쪽에는 세례요한이다.
성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회화
헌당 당시, 당내에 빛나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아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거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근년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前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당내에는 대소의 주두(柱頭) 조각으로 대표되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덧 칠을 벗겨낸 성당 내부에서 발견된 Deesis를 비롯한 뛰어난 회화 작품에도 불구하고복원 작업은 종교적 갈등으로 중단되었다.
향후 전망
그리고 지금 피사이사탑 이후에 최고로 많이 움직인 석조건축물이고 한50~100년후에 무너질수도 있다고 한다.